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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걸 쓰고 올립니다
스가와라는 말라가고 있었다. 카게야마를 이기고 싶은 마음. 더 잘하고 싶은 욕심. 스가와라는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채찍질했다. 소꿉친구인 다이치 조차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스가와라는 옆에서 잡아주는 이 하나 없이 많은 것을 이뤄내려 애썼다. 그의 노력에 칭찬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날때마다 그는 자신을 더욱 옥죄었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는지, 세이죠학원 과의 경기 도중 쓰러진지 3일째가 되던 날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악몽에서 깨어나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악몽이라도 꾼거야?" ".....?" 세이죠의 주장이자, 주전 세터인 오이카와가 제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스가와라는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
비가 내리는 어둠 속, 촉촉하게 젖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던 하얀 피부의 여리여리한 체형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다이치, 가지마." "... 스가, 난 가야 해. 붙잡지 마." 다이치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하는 스가와라의 눈을 애써 외면했다. 자신이 떠나야만 하는 이유, 떠날 수 밖에 없는 이유. 그것이 스가와라였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을 수 없었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 제 앞에 그가 서 있는 것 조차 싫었다. 다이치는 제 팔을 붙잡으려는 스가와라의 손을 거세게 쳐냈다. "건드리지 마." "...우리 사이가 왜 이렇게까지 되버린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순간 온 몸에 소름이 ..
그건 갑작스럽게 찾아와 그를 짖눌렀다. 평소와 다를 거 없는 주말이었다. 오랜만에 늦잠을 잔 스가와라 코우시는 밀린 집안 일을 끝내고 소파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일어난지 몇시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해는 서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문으로 노을진 오후의 포근한 봄 바람이 들어왔다. 꽤 오랜시간 동안 머리를 자르지 않은 탓에 아무렇게나 길게 늘어져있는 머리칼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숙면으로 몸에 피로는 거의 풀린 상태였으나, 봄바람이 실어온 나른함에 소파 위에 가로 누웠다. "우욱-!" 갑자기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목에서 쌉싸름한 쓴맛이 느껴졌다. 그는 곧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변기통에 머리를 쳐박고 토악질을 해댔다. 빈 속이였기 때문에 개워낼 음식물은 없었다. 한참 위 액을 쏟아내고 그..
몇 달이나 남았을까. 아니 몇 일..? 어쩌면 몇 시간. 종양을 발견 했을때, 병은 이미 커질대로 커져 손쓸 방법은 없었다. 의사는 수술을 해도 소용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말을 이었다. 마음의 준비..? 환자에게 직접적으로 이런 말을 해도 되나. 내 스스로 받은 충격보다 주변인이 받을 충격에 덜컥 겁이 났다. 그 아이가 이 이야기를 듣고 버텨낼 수 있을까. 충분히 나 없이도 살 수 있는 아이지만, 난 그 아이 없이 살 수 없다. 진료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오이카와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다. 단순한 건강검진 인줄로만 알고 있는 녀석에게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까. 이럴땐 어떻게 해야 하지. 진료실 문고리를 잡고 한참 고민하다 열었다. 진료실에서 가장 가까운 의자에 기대어 앉아있는 모..
스가와라 코우시. 이름이 생겼다. 주인님이 아닌 다른 이에게 받은 이름. 메마른 가슴이 벅차 오르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은. '그래도 괜찮아.' 애써, 기분을 가라앉혔다. 나와 시선을 맞춘 오이카와의 눈이 깨끗하고 순수했다. 어떻게하면 저렇게 투명할 수가 있을까. 오이카와를 만나기 전에 가게에 들린 손님들에게서는 순수하고 투명한 눈을 볼 수 없었다. 심지어 오이카와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의 눈 조차도 탁하고 흐리멍텅했다. 그런데 왜 이 아이만.. "코우시, 이제 나랑 재밌게 노는거야." '좋아.' 오이카와를 따라 웃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오루 왔니?" "엄마.." 방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와 오이카와의 이름을 불렀다. 웃고있던 오이카와의 표정이 달라졌다. 엄마..? 저..
오늘도 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내 하루는 오이카와를 기다리면서 시작하고 기다리면서 끝을 맺는다. 그를 만나고 함께 지내게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금은 멀어졌지만, 난 여전히 그를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다. 태양이 고개를 숨기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다. 그 날도 나를 제외한 다른 녀석들이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들은 예의가 없었다. 남들보다 자유를 빨리 얻는 다는 이유만으로 그들 만의 세계를 만들고 자신들 이외의 것들을 배척했다. 그러나, 난 그들이 부러웠다. 언젠가, 나와 꽤 오래 같이 있었던 녀석이 선택되어 이 곳을 나가기 직전에 내게 비수를 꽂았다. '넌 아마 여기서 계속 살게 될 거야.'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에 며칠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은 몇..
눈을 떴다. 꿈도 꾸지 않고 꽤 괜찮은 컨디션의 별 다를 거 없는 평범한 오후였다. 딱 한가지만 빼고. 당연히 누군가 있어야 할 옆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스가와라가 내 곁을 떠난지도 꽤 오랜시간이 지났다. 이유는 간단했다. '성격 차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실상 표면적인 이유일 뿐, 더 많은 이유가 있으리라. 일어나 앉아 주인 없는 베개 위에 손을 얹었다. 내 손의 온기가 배게시트를 데웠다. 아, 이 느낌이 아닌데.. 스가와라는 늘 한결같이 상냥하고 예뻤다. 그 온기가 너무 따뜻해서 너무나도 고마웠다. 다른 사람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사랑을 느꼈다. 그도 내게 과분하리만큼 많은 사랑을 주었다. 그랬었다. "다이치 우리 그만할까." 숟가락을 든 손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내 눈을 바라보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