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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싶은걸 쓰고 올립니다
안녕하세요? 15살의 보쿠토상. 당신이 이 편지를 읽고 계신다면 저를 찾아주시기 바랍니다.전 미래의 아카아시 케이지 입니다. 그 쪽 세상에 아카아시는 아직 당신과 만나지 않았습니다만,저는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둘만의 추억의 장소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책상 서랍 속에 이상한 쪽지가 들어있었다. 아카아시 케이지라는 사람에게서 온 미래의 편지? 쪽지를 들고 반 아이들에게 누가 쓴거냐고 물었지만, 절레절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아무렇게나 구겨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고 창 밖을 바라보았다. 태양이 하늘 정 가운데 올라있었다. 체육수업이 있는지 운동장 가운데에 서 있는 체육복 무리가 보였다. 언제봐도 저 체육복은 촌스럽게만 보인다. 위 아래 모두 주황색으로 색을 맞춘 여름용 체..
내가 널 처음 만난 날,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넌 수줍게 어르신의 뒤에 숨어 바지자락을 잡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온 세상이 다 하얗게 변해 있었는데, 네 주위만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칠흑같이 까만머리가 주변의 색깔을 바꾸고 있었다. "안녕!" 움찔. 고개를 숨겼다가 다시 빼꼼. 짧은 목례를 하는 너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넌 낯을 가리는가 싶다가도 내 곁으로 쪼르르 다가와 말을 걸고 지그시 지켜봐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웠다. 어느 날엔가 제 배게를 끌어안고 내 방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다. "보쿠토상, 같이 자도 돼요?" 그때, 머뭇거리며 문을 두드리던 너의 목소리에서 알았던 것일까.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 꿈을 꿨다. 네가 내게서 떠나가는 꿈. 너무나도 끔찍해서 꿈이라..
온갖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치료에 임했지만, 보쿠토는 실명하고 말았다. 약물치료로는 더 이상 호전될 수 없다는 주치의의 판정이었다. 오직 각막 이식만이 그의 눈을 살릴 수 있는 전부였다. 이식 가능한 신체장기 중 각막은 기증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는 신체부위 중에 하나다. 이미 실명해버린 상태에서 약물치료를 한들 수명을 다한 눈동자에 빛이 맺힐 리 만무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보쿠토가 그다지 침울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아마 스스로 제 눈을 자처한 든든한 지원군이 옆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지원군 또한 성한 몸은 아니었다.보쿠토 보다 어린 나이인 아카아시는 갑작스럽게 소아마비를 앓고 말았다. 덕분에 허리부터 그 아래쪽은 감각도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하체마비..
의사표현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실생활에 꽤 많은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보쿠토는 학생이자 배구부의 주장으로서,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이상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했고,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일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자연히,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옆에서 그의 일을 대신 해주거나 도와주게 되었다. 대부분의 일이 학교 후배, 배구부 부주장으로서의 일이었지만, '애인'으로서. 당연히 자신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쿠토는 그런 아카아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 무슨 할 말 있으세요 선배?" 보쿠토는 매니져들이 작성한 일지를 검토하고 있는 아카아시의 옆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일인냥 열심히 ..
아카아시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준 것인지. 다음 날, 여느 때처럼 어머니와 그의 병실을 찾아갔을 때 보쿠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카아시는 그녀가 무슨 마법을 부린 건 아닐까. 아니 무슨 말로 그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운 것인가 궁금했지만, 일부러 캐묻지 않았다, 그저 밝고 씩씩한 보쿠토로 되돌아 온 것이 고마울 뿐이었다. 보쿠토는 수술 당일이 되었을 때도 전처럼 무섭다고 겁먹거나 떨지 않았다. 이제 괜찮다며, 잘 끝내고 오겠다며 아카아시의 등을 짝짝 때려대기도 했다.수술 후,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 생각했던 기대감은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부작용이 그의 생명을 갉아먹으려 했다. 고열에 시달리던 보쿠토는 또 다시 뇌손상을 입을 수 밖에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보쿠토는 목..
답답함에 조금이라도 빨리 터트리고 싶은데 몸은 제 의지를 따라주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목소리는 되돌아 오지 않았다. 크게 소리 쳐보려 입을 열어도, 혹시나 고통을 느끼면 터져나오지는 않을까. 제 몸에 상처를 내보고, 일부러 몸을 혹사시켜보아도 목소리는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해진 마음에 제 자신에게만 음소거 버튼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그의 애인도 마찬가지다. 굵고 큰 제 애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지가 며칠이 지났는지 몇달이 지났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긴 시간이 지났다. 어떻게 하면 고쳐지는 것인지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것인지 의사들은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목소리를 찾을 수 있을거라는 무신경한 ..
지루하기만한 병원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마지막 수술이 될 2차 뇌수술 날짜가 코 앞으로 다가왔다. 날짜가 다가오니 간단한 수술이라는 주치의에 말에도 날이 갈 수록 보쿠토의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아카아시는 큰수술도 성공적으로 끝냈고, 입원하고 있는 와중에도 긍정에너지가 넘치던 보쿠토였기 때문에 2차수술을 두려워하는 그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일까. 혹시나 어디가 안좋은 것일까 온통 보쿠토의 걱정으로 머릿 속을 메우고 있었다. "형, 많이 무서워요?" "응. 나 무서워 아카아시." 미세하게 떨리는 보쿠토의 목소리에 무엇이 그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아카아시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아 보쿠토에게 가까이 다가가 질문했다. 보쿠토의 눈에 약간의 눈물이 맺혀있었다. "뭐가 무..
웬일인지 아침 일찍부터 눈이 떠졌다.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보쿠토는 제 옆자리에 누워 평온한 얼굴로 자고 있는 아카아시를 돌아봤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평화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으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보쿠토는 병원을 제 집 드나들 듯 입원과퇴원을 반복했다. 보쿠토가 아카아시를 처음 만난건 아카아시의 어머니가 보쿠토의 주치의셨기 때문이었다. 외동 아들인 아카아시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보쿠토를 잘 따랐다. 보쿠토도 그런 아카아시를 친동생처럼 살갑게 대해줬다.그로부터 3개월, 보쿠토의 첫 뇌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곧바로 두번째 수술 날짜가 잡혔다. 두번째 수술은 위험성이 낮은 비교적 간단한 수술이었지만, 첫 수술의 후유증 방지를 위해 수술..